IDR Architects Projects News News People Contact Projects
아이디알의 매곡도서관 이야기 | 이승환

우리 아이디알 건축사사무소의 첫 프로젝트는 도서관이다. 40이 다 된 늦은 나이에 몇 년 간의 영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건축가 부부가, 덜컥 이름만 있는 사무소를 개소하고 할 일 없이 먼 산만 바라보던 시절이다. 저 멀리 울산에 도서관 설계공모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오로지 도서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접수를 했다. 강의를 나가야 했던 나대신 보림 소장이 갓 백일 된 셋째를 안고 울산을 다녀왔다. 사소한 서류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먼 걸음을 한 번 더 했고, 그게 억울해서 꼭 안을 완성해서 내야겠다는 다짐이 굳어졌다. 꾸역꾸역 도면을 그리고 이미지를 만들어 제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당선이 되었다. 개소 후 첫 프로젝트였고, 지역 건축사가 아니면 당선 확률이 거의 0에 수렴하던 당시 지역 공모전의 관행을 감안하면 마치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우리 부부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보다는 보림 소장이 책, 그리고 도서관에 대한 애정이 더 깊다. 처음 신혼살림은 과천에 차렸는데, 그때 갓 태어난 첫째를 데리고 과천정보과학도서관에 자주 갔다. 이공건축의 작품으로 당시 건축문화대상에 입선한 따끈따끈한 건물이었다. 크고 넓고 책도 많고 DVD도 많아 발이 닳도록 많이 다녔다. 2주에 다섯 권인가 최대 권수를 꼭꼭 채워서 대출하고 연체 없이 반납해서 우수회원이 되기도 했다. 다 좋았지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어린 첫째를 데리고 일반열람실에 갈 때면 소리를 크게 내지 않도록 주의를 줘야 하는 일이었다. 부부가 같이 가면 어린이열람실에서 한 사람이 아이를 보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이 얼른 일을 보듯 일반열람실에 다녀와야 했다. 10년이 훨씬 더 지나 울산의 매곡도서관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어른과 아이가 서로 손잡고 나들이하듯 같이 갈 수 있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고, 당선되면 그런 도서관이 정말로 지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살짝 흥분이 되기도 했다.

매곡도서관은 평지인 듯 아닌 듯 애매한 땅의 경사에서 중요한 힌트를 가져왔다. 1층의 어린이열람실과 2층의 일반열람실이 마치 하나의 공간인 듯 순환하는 경사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또 통합되는데, 이런 효과는 사실 밖의 경사를 건물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결과다. 아이가 아래 단이 진 열람실 소파에서 뒹굴며 책을 보는 동안, 부모는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며 찾고 싶은 책을 찾을 수 있다. 가끔 아이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면 난간에 다가가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면 된다. 공모전에 당선되고 나면 발주처와 설계안에 대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조율하는 회의를 가지는데, 대개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새롭거나 실험적인 시도에 대해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매곡도서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도서관은 조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다들 가지고 있었고, 두 개 층이 커다란 오프닝을 향해 열려있는 당선안을 보고 발주처는 난간 위로 유리벽을 세워서 소음을 막고 싶어 했다. 비록 시각적으로 연결될지언정, 유리로 막힌 열람실은 우리가 만들고 싶은 도서관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애당초 우리는 도서관이 왜 조용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시끌시끌한 교보문고 안에서도 열심히 독서를 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커피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고? 오히려 너무 조용하니 작은 소음이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냥 적당히 시끌시끌하면 모든 것이 신경 거슬리지 않는 간지러운 소음, 화이트 노이즈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여하튼 우리는 자료를 만들어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의도를 설명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처음의 안을 지켜낼 수 있었다.

가끔 최근 지어진 도서관을 가보면 크고 화려한 로비가 방문객을 맞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트리움을 만들어 위에서 빛이 떨어지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북스텝이 있어서 앉아서 책을 읽으며 쉴 수도 있다. 나쁘지 않다. 그런데 열람실도 로비만큼 멋지게 만들어지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딘가 아쉽다. 도서관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열람실인데, 로비에 잔뜩 힘을 준 대신 열람실을 사무공간처럼 평범하고 밋밋하게 만든 도서관은 어딘가 헛다리를 짚은 느낌이다. 물론 로비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대개는 열람실에서 나올 때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에 로비에서는 아무 책이나 들춰서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곡도서관은 사업비를 증액을 할 수 없어 절대적으로 주어진 예산을 맞춰야 하는 까다로운 프로젝트였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힘 조절이 필요했다. 로비는 최소한의 기능만 수행하게끔 빨리 거쳐 가는 공간으로 다이어트를 했고, 대신에 도서관의 확실한 주인 자리를 열람실에게 주었다. 처음 방문하면 언제 로비를 지나쳤는지도 모르게 두 개 층이 시원하게 뚫린 열람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매곡도서관이 당선된 2015년은 처음으로 공공건축에서 무장애 공간 설계가 의무로 적용되기 시작한 해다. 마침 경사로가 위아래 열람실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니, 우리는 이 경사로를 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1/12 기울기로 만들었다. 사실 원래 땅의 기울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밖의 경사를 안으로 가져온 전략이 여러 모로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이렇게 만들고 보니, 커다란 하나의 열람실을 가장 기분 좋게 경험할 수 있는 경사로라는 산책길을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구분 없이 같이 쓸 수 있는 도서관이 되었다. 설계할 당시에는 워낙 지켜야 할 소소한 디테일이 많아 그 어마어마한 일의 양에 치를 떨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무장애 공간 설계의 원칙에 가장 가까운 결과를 만든 것이라는 생각이 그때의 고생에 대한 위로가 되었다.

영국 런던에 대한 여러 기억 가운데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별 할 일 없이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던 때가 종종 떠오른다. 사우스뱅크 센터는 템즈강 남쪽에 공연장과 미술관이 모여 있는 거대한 복합문화공간인데, 평일 휴일 할 것 없이 런더너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여러 건물과 그 사이를 잇는 크고 작은 마당들이 그야말로 모두를 향해 열려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 있을 때면 분명 모두를 위한 공간인데도 그 공간이 주는 풍요로움이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 공공공간이 가지는 힘이 이런 거구나.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이런 작은 깨달음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중에 매곡도서관이 다 지어지고 운 좋게 이런저런 상을 받게 되어 강연을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런 느낌을 우리가 만든 도서관을 통해 어떻게든 설명하고 싶어졌다. 난 공공공간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곳을 방문하는 개인이 그 장소에 애착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공공간의 사적 전유(專有, appropriation)’, 나중에 말을 지어내는 것을 싫어하고, 뭔가 있어 보이려고 어려운 말을 쓰는 것은 더 싫어하는 보림 소장은 질색을 했다. 난 이게 그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우겼고, 몇 번의 티격태격 끝에 공식적인 강연이나 출판물에 매곡도서관의 공공성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매곡도서관은 경사로, 낮은 천장, 높은 천장, 창가, 천창 아래, 단이 넓은 계단처럼 각각 자기만의 특색을 가진 공간이 여럿 있고, 거기마다 어김없이 열람석이 놓여있다. 개인의 취향, 그날의 기분, 동행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메뉴처럼 펼쳐져 있는 꼴이다. 역시 보림 소장이 반대했지만 ‘비균질적 공간(heterogeneous spaces)’이라는 좀 있어 보이는 설명을 여기에 덧붙였다. 더도 덜도 말고, 우리는 매곡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이 집을 나서며 ‘내가 좋아하는 그 자리가 오늘 비어 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품었으면 좋겠다.

내가 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지식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공간으로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대부분의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는다고는 하지만, 무한에 가까운 네트워크는 내 가치관과 관심사에 맞는 정보를 계속해서 찾아주기에 오히려 확증 편향을 부추기는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또 언제나 한 번에 볼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화면의 크기로 한정되므로 어떤 지식의 전체적 크기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기 마련이다. 도서관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그 지식의 크기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책 사이를 걷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 인터넷의 하이퍼링크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심거리 사이의 도약이 가능하다. 내가 전혀 모르던 다른 세계를 우발적으로 발견했을 때 느끼는 기쁨은 도서관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우리가 매곡도서관을 설계하면서 은연중에 시도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도서관의 매력을 공간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구획을 위한 벽을 최대한 없애고, 기능을 담은 단위 공간이 마치 느슨하게 열린 주머니처럼 형태 생성의 논리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도되도록 했다. 경사로를 따라 서로 다른 높이의 판들이 달라붙는 원리로 만들다보니 어렵지 않게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주어진 실의 크기를 염두에 두고 배치를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재미있는 공간을 만드는 원칙을 세우고 그 과정을 거쳐 나온 여러 크기의 공간에 알맞은 기능을 매칭해주는 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열람실은 처음 들어섰을 때 한 눈에 그 크기가 쉽게 가늠이 되지 않고, 경사로를 돌아 올라갈 때마다 어딘가 새로운 구석이 나타나거나 다른 모퉁이로 연결될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마치 지식이 확장되는 방식과 비슷하게.

아쉽게도 지금의 법 규정으로는 매곡도서관 같은 도서관을 다시 만들기는 어렵다. 불과 8년 전에 당선되고 지어진 지는 6년이 된 건물인데도 그 사이 건축 관련법은 점점 더 까다로워졌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층에 방화구획을 하도록 바뀌었고, 방화구획을 하더라도 방화스크린처럼 가이드레일 없이 깔끔하게 설치되는 제품은 이제 사용하기 힘들게 되었다. 위아래 층이 시원하게 열린 공공건축을 만들고 싶은 건축가들에게는 우울한 소식이다. 무장애 공간 인증도 예전과는 달리 요구하는 기준이 더 높아져 1/12 경사로는 퇴짜 맞기 일쑤고, 1/18 경사로가 새로운 표준처럼 되었다. 1.5배 더 길어진 경사로는 비장애인에게 너무 지루할뿐더러, 평면을 짤 때도 좀처럼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요즘처럼 전동휠체어가 일반화된 세상에 장애인만을 위한 기다란 경사로가 좋은지, 매곡도서관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쓸 수 있는 좀 짧은 경사로가 더 좋은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지어지는 외국의 도서관을 보고 왜 우리나라에는 저렇게 멋진 도서관이 없나 안타까워한다. 사실 그렇게 된 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서관 설계를 해 보면 건축가들이 좋은 설계를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너무나 짧은 설계 기간, 현실적이지 못한 예산, 불합리한 공공건축의 생산 과정, 좋은 건축에게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관련 법 규정 등 꼽을 이유는 많다.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건축가들도 사람인지라 설계보다는 설계안을 가지고 싸우는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허비하다 보면 지치고 맥이 빠져 어느 선에서 현실과 타협을 해버리고 만다. 그런 면에서 건축은 건축가 개인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작업에 가깝다. 건축의 품격과 가치는 필요한 기능 이상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역할은 그 건축이 속한 사회의 몫이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매곡도서관이라는 첫 작업을 끝내고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웹진 <THE LIVERARY> 2023년 4월에 게재